유리알 유희 중에서
... 그들의 유희는 단순히 즐겁고 뜻 없는 아이들의 장난만은 아니었다.
풀 길 없는 현실 문제나 불안한 몰락의 예감을 눈 가리고 피하며,
될수록 순진한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깊은 욕구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끈질기게 자동차 운전이나 어려운 카드 놀이를 배우고 꿈꾸면서
크로스워드 퍼즐 풀기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이미 교회에서는 위안을 얻지 못했고
정신으로부터는 조언을 받을 수 없었으며,
죽음이나 불안, 고통이나 기아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논문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도,
공포에 대해서 자기를 강화하고
죽음에 대한 마음속의 불안을 정복하는 일을 위해서는 시간과 수고를 아꼈다.
그들은 경련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보냈고 내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한편 강연도 성행하였다.
잡문*이 약간 고상하게 변형된 것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말해 두어야겠다.

교양은 예전의 개념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민들은 교양이라는 개념에 대해 여전히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문가나 사이비 사상가의 패거리들은 논문 이외에 강연도 대량으로 그들에게 공급하고 있었다.

... 청중은 저마다 그 중 하나라도 대강 알아듣게 되면 좋아하였다.
시인에 대한 강연도 있었지만
청중은 그의 작품을 한번도 읽어본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읽을 마음도 갖지 않았다.


* 잡문 시대: 유리알 유희 시대 이전의 시대.
'잡담을 늘어놓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공장 제조식으로 생산된 원고로 가득한 시대. 주로 유명 인사의 신변잡기가 유행. 놀랄만큼 독서를 좋아한 시대였으나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원고들로 가득했음. 니체와 그 당시 여성복/위대한 작곡가가 좋아하는 음식 등.


[유리알 유희] 중에서.
헤르만 헤세.1943년./박환덕 옮김/범우사

by -뽀- | 2005/06/13 00:15 | 명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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